사운을좌우한도전정신과창업주의건설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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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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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운을건첫번째승부수,대전공설운동장건설

1979년 10월 5일, 대전공설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서는 제60회 전국체육대회를 알리는 개막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이인구 명예회장도 귀빈석에 앉아 벅찬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로부터 6개월 전, 대전시민을 비롯한 충남도민들은 대전에서 체육대회의 환갑잔치인 갑년체전이 불과 반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어쩌면 대회가 무산될지도 모를 만한 커다란 문제가 터지고 있었다. 문제의 진원지는 체전의 주경기장으로 쓰일 대전공설운동장 건설공사였다. 이를 위해 대회 개최 1년 반 전인 1978년 봄 이 대형공사에 대한 입찰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입찰자 중에는 계룡건설을 비롯한 충남 건설회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당국에서는 입찰에 참가할 자격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입찰 결과 서울의 중견 건설업체인 대서종합건설에 낙찰되었는데, 시공 중 이 업체가 체전 개막 6개월을 앞두고 도산하고 만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공사의 진척도였다. 그때까지도 본부석쪽 기초공사만 끝낸 상태에서 귀중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본부석 양쪽은 아직도 토성이 그대로 남은 채였다. 당장 공사를 시작한다 해도 체전 전에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어서 충남도 당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도당국에서는 당시 전국 5위 내의 대형 건설회사에게 9월 말까지 준공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절대 공기가 부족하여 해낼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추진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회사마저 손을 내젓자, 어쩌면 전국체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끝내 주경기장 건설의 공기를 맞출 수 없다면, 체전포기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국체전 개최를 통해 대전의 발전을 5년 이상 앞당긴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가는 것은 물론 대전 개최에 한창 부풀어 있던 충남도민의 염원과 자존심이 큰 상처를 받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손수익 충남도지사는 지방업자로서의 사명감을 내세워 대전 지역의 4대 건설업체가 공동으로 주경기장 건설에 나서달라고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건설협회 충남도지부장은 다름 아닌 이인구 명예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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